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발췌)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장은P21 ‘선’ 과P54 ‘여인’ 이다. 좀 길지만 여기에 남기고 싶다. 그 외의 인상적인 문장들도 몇 개 발췌한다.

화가가 우연이나 한 순간의 감정으로 붓을 갈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선을 그린다는 것을, 이렇게 현대적인 글로 보여줄 수 있다면 화가에게도 글이라는 것은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모르겠다. ‘선’은 미술가만이 쓸 수 있는 환상 장르 소설같다.

‘여인’편에서는,  그 시대에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음에도 그림에 정진하는 한 여인을 지지하는 편견없는 선배의 마음이 느껴진다.

 

선(線)
1

비가 흡족히 젖어 흐르면 목욕탕에 들어간다.
해부학은 수술실 위에서 사용되지만, 인체를 구성하는 데는 거짓말이 된다.
반드시 그는 그렇게 모가지가 길어야만 하고, 동체(胴體)가 짧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가 미지근한 물 속에서 콩나물같이 솟아올라 삼색 타올을 사용하고, 목욕탕 옥상을 산책할 땐, 흐르던 비가 걷히고 지상에 한 오라기의 그늘도 지지 않았다.
춘사(春蛇)가 밤(栗)꽃을 꽂고 실안개처럼 등나무 어귀에 이르렀을 때, 옥사의 여인은 오수(午睡)에 흔들리는 손수건의 윙크를 받아, 아직도 탕기(湯氣)가 뭉게뭉게 떠오르는 몸뚱어리를 풀어 헤치고, 하늘에 뻗어오를 듯 기지개를 내뽑는다.
그만 나는 지오토의 잎사귀로 왼편 흉부에서부터 배꼽을 중심 삼아 오른편 허벅다리 선을 내리그었다.
진짜로 이러한 선을 그린 것이 아니라, 대학병원 정형외과 제2호 병실의 두 번째 침대에 누워 나는 이러한 선을 생각해 보았다.

 

2

비 내리는 아침이면, 출근시간 전에 기어코 나는 전차를 탄다. 출근시간 전이어야 전차 바닥이 청결하고, 또 승객수가 내가 꾀하려는 작품을 제작하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휘어지게,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構成美)를 알았고, 회화정신(繪畫精神)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버라이어티한 음악까지 감득(感得)한다.

3

 나는 한 잔 대포에 비지국을 향락한 뒤면, 웃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하이볼을 마신다. 그래야만 하이볼의 맛을 확실히 알 수가 있고, 그 진경(眞境)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
여기서 하나 슬픈 일은 나에게만 얼음덩이 하나를 더 넣어 주는 영리한 바텐더를 만났다. 실로 말을 뱉기가 귀찮으나, 결국 나는 간곡히 청하여 얼음조각 하나를 더 얻어 글라스에 담는다. 그런 뒤에 내 열 손가락은 습관적으로 야성(野性)을 실현하니, 현미경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구체(球體)의 집단 속에서 넘노는 얼음이 글라스의 안 벽에 부딪힐 때 일어나는 음향은 히틀러 앞에서라도 뻐기지 않고는 못 견디게,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이렇게 사랑하는 법이 불원하여 결국 환멸(幻滅)하게 되면, 나의 오장 속엔 선이 그려지는데, 뱀이 제 구멍에 들어가듯 가장 익숙하게, 바늘보다 가늘게, 내 몸뚱아리보다 더 굵게 굽이 굽이 그려진다.
만일, 얼마 뒤에 마담의 의사(意思)를 물리치고 글라스를 깨트렸다면, 술주정이거나 변태가 아니고 무어냐고? 고급 크림을 너무 많이 발랐기에 체온계가 미끄러져 땅바닥에 깨어졌거든 체온계 값을 내라?
나는 이 병실에 무리하게 집어 넣어졌기에, 내 소중한 손목시계를 침대 모서리에 부딪치어 영영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 이런 무법한 곳에는 있을 수 없다고, 과연 나는 과장선생에게 퇴원을 시켜 달라 해야 할 게 아닌가?
퇴원을 허락하지 않는 과장선생은 아까 그 마담보다 좀 나은 편이지만, 우연한 사실을 의식적으로 감행하는 나를 유리 들창에 철책이 없는 아주 전망이 좋은 2층 남향 병실에 집어 넣어야 할 것이다. 글라스의 파편은 주어 모으던 기사(技師)는 그 수술대의 의사같지 못했으니, 그 조각조각의 선의 구성을 계획할 능력이 없어 그만 무교(武橋)다리 으슥한 곳에 파편을 버렸다.

1940. 5

여인

 언젠가 젊은 여성 한 분이 그림을 들고 나한테 왔다.
화가가 된다는 것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했다 한다. 남편은 항해사였다.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데, 이 여성은 예술을 하기 위해서 결혼을 했단다. 그 후 간혹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그림은 재주가 있는 편이었다.
단 내외만 사는 단출한 새살림이 아니라, 층층시하에 수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그야말로 시집살이 틈에서 독립된 방도 없이 그림을 그려 낸다는 것, 그림공부를 한다는 것은 실로 귀신의 재주일 수밖에 없다. 보면 귀족적인 몸매인데, 거칠어진 손을 보면 밥 짓고 빨래하는 노력만도 대단한 것 같다.
한 번은 남편과 동반해서 찾아왔다. 대단히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남편이면 아내가 미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후 우리도 이사했고 그들도 이사했다. 그 동안 격조히 지내 왔는데, 한번은 뜻밖에 부부동반으로 그림을 들고 나타났다. 고호 냄새가 나나 대단한 발전이었다.
청년 남편은 이번 모(某) 해양대학 교수로 전직되어 간다 한다. 대단히 반가웠다. 이제 이 젊은 부부의 앞에는 해방된 생활이 전개되는 것이다.
나는 내 일같이 기뻐서 격려와 축복과 아울러 미술론을 한참 하다 보니 우리 여류화가는 하품을 하고 있지 않은가-보아 하니 그녀는 만삭이 되어 있다. 옥동자를 낳으면 화업을 이어 가라고 부탁했다.

[수도평론], 1953. 6

P34
한 길 건너서 솜틀 소리가 난다. 푹닥푹닥 기계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간다.

P36
아내는 피카소를 일러 ‘안하무인의 화가’라고 한다.

P. 98
또 이 페르시아의 미니아추르는 사람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니어처의 오브제 다르(예술품)를 만들었고 모든 사물의 앙징스럽고 귀엽고 세세한 것을 가리켜 미니어처라고 통칭하게 만들었다.

P157
또 고깔이 붙고 노끈에다가 막대기 단추를 한 외투

P160
불어 공부를 충실히 하여라

P166
백설같은 침상

P188
우리 둘이만을 위해서 우리들은 살고 싶고 노력하고 싶어. 이것이 나의 진실이야. 나는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야. 너도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고

P198
신서울을 한강 건너로 옮길 만도 하다

P201
윤군의 깜찍한 감각에는 찔끔했다.

P206
산산이 부서진 루오의 그림을 생각해 본다

P228
그러던 항아리들, 부산 피난살이 3년 만에 내 집 들에 들어서니 우거진 난초 속이 온통 항아리의 파편천지였다. 사금파리 무더기에 서서 나는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무엇인지 통쾌한 그런 심정이었다. 그 후 나는 다시 항아리에 손대지 않았다. 한두 개 요행이 남아 굴러다니는 것을 주워 적당히 두고 보는데 안심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으로 항아리를 모아 봤고 뜻밖에 내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재난으로 해서 한꺼번에 없어지고 말았으니 과거의 내 장난이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

P230
조선항아리는 철두철미 평범합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한 것,
거기엔 아무런 기교와 재조(才操)와 계획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한 형태, 자연한 빛깔은 도공의 무심(無心)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미술품을 만들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P232
우리 민족은 과거에도 자기를 애완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그랬습니다. 문방구 등의 특수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용기(容器)는 거의가 부엌살림에 따르는 실용기였습니다. 애완, 음미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실생활에 쓰는 일종의 소모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루어진 자기는 진실로 소박하고 단순하고 건전하고 원만하고 우아하고 따뜻하고 동적인가 하면 정적이고 깊고 또한 어딘지 서러운 정이 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아름다운 자기가 되었습니다.

목화(木花)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하늘처럼 싸늘한 백자, 쑥덕 같은 구수한 백자, 여하튼 흰 빛깔에 대한 민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질인 동시에 또한 저농이 아닌ㄱ 합니다. (未完)

P234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때에도 한 개인이 글을 써서 그것이 잡지가 되고 신문이 되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읽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도서관이나 개인의 서고에 보직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영원에 가깝도록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대단히 무서운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P259
나는 짧은 외국여행에서 돌아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종로를 걸어도 광화문을 걸어도 어쩐지 내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듯한 그럼 무중력 상태 같은 것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육중하게 뻗어간 건물을 좌우에 두고 산의 연결 같은 돌바닥의 길을 걷다가 서울 거리에 나타나니 습관의 감각은 간사하기도 해서 몸의 중량이 이상해지며 허공을 걷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P316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문학*무용*연극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

P319
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P345
빛깔을 엎질렀다.

P347
4월 17일
뉴욕 타임즈엔 매일 피카소의 기사. 죽고나니 어질러놓고 간 사생활이 지저분하게 나온다. 아!! 피카소 묻히기 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를 읽고

김환기씨의 작품을 주의깊게 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화가인 그가 남긴 그림보다 글을 먼저 대한 셈이다.

한국전쟁 전후 시대를 묘사하는 글을 너무 오랫만에 봤기 때문에 재미있었고, 그 시대를 통과해 온 예술가의 시선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더 좋았다. 흔히 우리가 외국과 우리 나라의 시대사의 그 연도를 서로 연결시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김환기씨가 루오, 미로, 브라크, 뷔페, 마네시에를 언급하거나, 동시대에 살아 있던 피카소를 추앙하거나 할 때면 그제서야 아 그 시대가 이 시대구나 하는 것이었다. 특히,  친했던 형으로 보이는 김중업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르꼬르뷔지에 스튜디오에 취직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장면이라던가, 뉴욕에서 친분을 쌓은 모딜리아니의 젊었을 적 애인인 폴란드인 화상 ‘루니아’에 대한 언급을 볼 때는 정말 많이 놀랐다. 그 시절에 이미 세계적인 예술 시장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예술가였을지 모른다. 그런 그도 젊은 시절에는 가난한 전후의 한국에서 해외여행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체념적인 얘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 후에도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의 부의 배경에 궁금증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이 책만으로는 판단할 만한 자료가 없다. 이 작가의 전기가 한 권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된 평론집도 없는 것 같다.

 

P47

파리에 보내는 편지
-중업형에게

중략

‘생각하면 참 미술가처럼 악착같은 존재는 없는 것 같소. 이런 상황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참 지독하거든. 만사가 그림을 할 수 없도록만 되어 있는 여건에서 그래도 그림을 해나가는 걸 보면 뭐라 할까 정말 지독한 친구들이오.

…중략

그런데 우리가 전쟁을 겪고 부산에 내려와 전쟁 속에서 살면서 친구들을 보고 나를 보매 그것이 문학적 감상이 아니라 우리들은 분명히 예술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정말 예술과 싸우고 있는 것이오. 투쟁의 실감, 현실의 실감, 예술의 실감-이 얼마나 소중한 실감이 아니겠소.’

중략
1953. 7

 

피카소 얘기가 나와서 하나 더 언급하고자 한다. 이 책에는 김환기씨가 파리나 뉴욕에서 생활했던 시기의 일기도 포함되어 있어 외국어나 외국어명칭이 종종 나온다. 그럴 경우 반드시 국어로 음차된 것으로 표기되어 원래의 사전에서 그 영어나 불어의 원래 단어를 찾아 본 적이 많은데, 단 하나의 문장만이 영어 원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것은 작업 중 라디오에서 들은 피카소의 부음 소식이다.

 

4월 8일. 일어나니 10:30 비가 온다. 일을 하며 방송을 듣자 하니 Pablo Picasso died this morning, at the age 91.  태양을 가지고 가버린 것 같아서 멍해진다. 세상이 적막해서 살맛이 없어진다. 심심해서 어찌 살꼬. 전무후무한 위대한 인간, 위대한 작가, 명복을 빈다.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예전에 KBS에서 영화 ‘러브레터’를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더빙판이었는데, 설원에서 후지이 이츠키가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 데쓰!’라고 외치는 그  장면은 한국어 더빙을 입히지 않고 원본 그대로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그 때, 나는 외화 프로듀서의 그 대담한 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장면만큼은 더빙으로 연출할 수 없는 오리지날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나는 김환기씨가 이 문장만 영어로 쓴 것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부음을 들었을 때의 자신의 충격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형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한 번, 남편과의 대화 중 예술 장르 중에 무엇이 최고냐는 질문에 나는 음악이라 답했고 남편은 글이라고 답했었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으레 미술작품을 떠올리는데 나는 아주 내밀하게  그 작품들을 이해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음악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서 울어본 적은 있지만 미술 작품을 보고 한 번도 운 적은 없으니 말이다. 단 한 번, 작품 앞에 섰을 때 숨이 턱 막혀본 적은 있다. 그건 스페인 여행 중 보게 된 피카소의 ‘게르니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하면서 미술관을 가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감동을 기대하고 가는 것은 아니고 그저 작품의 실물을 직접 보는 것을 어떤 미술작품에 대한 궁극의 앎의 경지로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후 내가 김환기씨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한다고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이 책 한 권에서 받은 감상이 더 강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독서는 친구 세짐의 공이 크다. 그녀가 환기뮤지엄에서  이 책과 그의 아내인 이향인씨가 쓴 수필집, 이 두 권을 산 후에 한권을 나에게 빌려주고 서로 책을 읽고 돌려 보기로 했다. 이번주에는 세짐이를 만나서 이향인씨 책을 빌려올 거다. 미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세짐이에게 나중에 줄 만 한 책 한 권을 염두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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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雪国 (가와바타 야스나리)을 읽고

이 소설에는 겨울에 눈에 갇힌 고장의 여자들이 짜는 ‘지지미ちぢみ’에 대한 언급이 있는 대목이 있다. 홈패션을 배워서 내가 초등학생일 때, 옷을 종종 만들어 주셨던 엄마는 자글자글한 주름 잡힌 이 얇은 원단을 ‘지지미’라고 알려줬었고, 내가 의류학과를 들어간 후에는 학교에서 시어서커(Seersucker)라고 다시 배웠다. 지지미는 나에게  여름에 집에서 뒹굴거릴 때 입는 궁상맞는 옷이었는데, 시어서커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다시 개명을 한 것이다. 내가 결혼할 때 친정엄마가 나와 남편에게 선물해 준 여름 잠옷도 이 지지미였는데, 10년이 지난 어느 여름밤 남편이 이게 제일 시원하다고 뜬금없이 고백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에게 이 소재는 항상 여름만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갑자기 눈의 고장에서 겨울에 자아지고, 눈밭에서 바래지는 지지미 원단의 풍경을 상상하게 해 주는 것이다.

<책 속에서>

‘눈 속에서 실을 만들어 눈 속에서 짜고 눈으로 씻어 눈 위에서 바랜다. 실을 자아 옷감을 다 짜기까지 모든 일이 눈 속에서 이루어졌다. <눈 있는 곳에 지지미 있으니, 눈은 지지미의 모태로다>라고 옛사람도 책에 썼다.

눈에 갇힌 기나긴 겨울 동안에 산촌 여자들의 일거리가 되는 이 눈 지방의 삼[베] 지지미는, 시마무라도 헌 옷 가게를 찾아다니며 구해 여름 옷감으로 사용했다. 춤에 관심이 있었던 연고로 옛 노 의상을 취급하는 가게도 알고 있어, 질 좋은 지지미가 들어오면 언제건 보여달라고 미리 부탁해 둘 정도로 이 지지미를 즐겼고 홑겹 속옷으로도 해 입었다.

눈막이로 쳐놓은 발을 걷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봄철이면 옛날엔 첫 지지미 장이 섰다고 한다. 멀리서 지지미를 사러 오는 삼도의 포목 도매상들이 묵는 단골 여관이 있었고, 처녀들이 6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짜는 것도 이 첫 장을 위해서였다. 가깝고 먼 각지에서 온 산촌 남녀가 모여들고, 갖가지 구경거리며 장사꾼들의 가게도 여럿 생겨나 마을 축제처럼 북적댔다고 한다. 지지미에는 옷감을 짠 처녀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종이표를 달아 그 솜씨를 1등, 2등 하는 식으로 품평했다. 이것이 며느릿감을 고르는 기준도 되었다. 어릴 적에 짜는 법을 배운 열대여섯살부터 스물네다섯까지의 젋은 여자가 아니고서는 품질 좋은 지지미를 만들 수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옷감의 윤기를 살리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음력 10월부터 실을 잣기 시작해서 이듬해 2월 중순에 천 바래기를 끝내는 이 작업은, 눈에 갇혀 마땅히 할 일도 달리 없는 기간 동안 하는 일인 만큼 정성이 담기고 제품에 깊은 애착도 깃들었음직하다.

시마무라가 입는 지지미 가운데는 어쩌면 메이지 시대의 처녀가 짠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지지미를 시마무라는 지금도 <눈 바래기>에 내놓는다. 누가 입었는지 알 수 없는 헌 옷을 해마다 생산지로 바래기를 위해 보낸다는 것은 성가신 일이지만, 옛 처녀가 눈에 갇힌 동안 기울였을 정성을 생각하면 역시 그 옷감을 짠 처녀가 살았던 고장에서 제대로 바래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깊게 쌓인 눈 위에서 바래는 흰 모시 가득 아침 해가 비쳐 눈도 천도 모두 다홍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름의 때가 말씀히 씻겨나가는 듯했고, 제 몸을 바래기하는 양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긴 해도 도쿄의 헌 옷 가게에 맡기는 것이라, 옛 방식 그대로의 바래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시마무라도 알지 못 한다.

바래기를 하는 가게는 옛날부터 있었다. 직녀가 저마다 집에서 바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바래기 가게에 부탁했다. 흰 지지미는 다 짠 후에 바래기를 하고, 색깔 있는 지지미는 실을 실패에 내다 걸어서 바랜다. 흰 지지미는 눈 위에 직접 널어 바랜다. 음력 1월부터 2월에 걸쳐 바래기 때문에 논밭을 온통 하얗게 뒤덮은 눈이 바래기 터로 쓰이게 된다.

천이든 실이든 잿물에 하룻밤 다궈놓았다가 다음날 아침 몇 번이고 물로 씻고서 짜낸 뒤에 바랜다. 이것을 며칠이고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흰 지지미가 거의 다 바래어갈 즈음, 아침 해가 떠올라 새빨갛게 비추는 풍경은 비할 떼 없이 아름다워, 따뜻한 지방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라고 옛사람도 쓴 바 있다. 또한 지지미 바래기가 끝났다는 것은 눈 지방에도 이제 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였으리라.

(중략)

털보다 가느다란 삼실은 천연 눈의 습기가 없으면 다루기 어려워 찬 계절이 좋으며, 추울 때 짠 모시가 더울 때 입어 피부에 시원한 것은 음양의 이치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은 이야기했다. 시마무라에게 휘감겨오는 고마코에게도 뭔가 서늘한 핵이 숨어 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한층 고마코의 몸 안 뜨거운 한 곳이 시마무라에게는 애틋하게 여겨졌다.

(중략)

눈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베 짜는 여인들의 생활은 그들이 완성시킨 지지미처럼 산뜻하고 밝지는 못했다. 마을 인상으로 충분히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지미에 관해 쓴 옛날 책에도 당나라 진도옥의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직녀를 고용해서까지 옷감을 짜는 집이 없었던 것은 한 필의 지지미를 짜는 데 워낙 많은 품이 들어 수지가 맞지 앟기 때문이라 했다.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이 남았다. 여름에 서늘한 감촉을 주는, 시마무라 같은 이들의 사치스런 옷으로 변했다.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 시마무라에게는 문득 신기하게 여겨졌다. 온 마음을 바친 사랑의 흔적은 그 어느 때고 미지의 장소에서 사람을 감동시키고야 마는 것일까?

 

 

베를린 누아르 3월의 제비꽃 (필립 커) 을 읽고

이 책은 사전 정보를 갖고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 사러 갔다가 눈에 띄었다.  최근에 인문 쪽 번역책만 이어서 읽고, 해독수준의 존 버거 책까지 읽다 보니까, 훌렁훌렁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정말 필요했다.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하는 주인공인 사설탐정, 귄터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를 떠올리게 했는데, 역자후기를 보니까 작가가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필립 말로가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깊은 잠 (Big Sleep)’ 한 권만을 읽었었는데, 읽으면서도 사람들이 찬사하는 것만큼 좋지는 않은데? 라고 의아했었다. 그 때 나는 필립 말로가 너무 멋있는 척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베를린 누아르’가 훨씬 재미있었다. 아마도 작년에 일 때문에 베를린에 두 번이나 다녀오면서 프리모 레비나 서경식 선생님의 홀로코스트 관련 책들을 통해 그 인간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편하게 취사선택될 수 있는지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가벼운 듯한 캐릭터의 탐정이 오히려 그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견디게 해 주는 장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쿠르퓌르스텐담이나 포츠담 광장, 쿠담 거리 등, 내가 가 본 적 있는 베를린 시내의 지명들이나 거리의 이름이 소설 안에 등장할 때마다, 작년의 베를린의 풍경들을 떠올려가면서 1936년, 그 시절의 베를린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홍콩의 곳곳을 소설 안에 등장시킨 찬호께이의 ’13.67′도 떠올려졌다.

‘푸른 밤 (조안 디디온, 뮤진트리)’ 을 읽은 2018년 1월 1일

새해 첫 날 읽을만한 책은 아니었다. 책을 읽고 나니, 죽음과 노화에 대해 골똘해졌다. 새해 첫 날에는 그래도 희망이라던지 신년 계획 등을 세워보는 게 좋 다는 것을 오늘 귀납적으로 알게 되었다.

진작부터 저자의 다른 책인 ‘상실 (The Year of Magical Thinking)’을 읽고 싶었는데, 절판됐기에 그냥 잊고 있다가, 지난 달에 이 책을 구입해서 하필 며칠 전부터 펼쳐 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남편과 나, 둘 다 출근하지 않았다. Aa에 같이 가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었고, 남편은 방송을 위한 선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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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서문 뒤부터는 내용의 1/3이 지나기 전까지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장들이 잘 읽히지 않았는데,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작가의 본래의 문체가 한국어로 바뀌면서 낯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안이 책 속에서 묘사하는 풍경들이 미장센이 세련된 영화의 장면들 같다. 조안 디디온이 워낙 패션이나 영화 시나리오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캐롤, 아이엠러브, 파프롬헤븐 같이 우울하지만 우아한 영화들이 떠올랐다.

p 69. 입양이 법적으로 완결된 1966년 9월의 어느 더운 날, 우리는 그 아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법정을 떠나 베벌리 힐스의 더 비스트로 식당으로 가 점심을 했다. 그날 그 법정에서 아기 입양은 그 아이 건이 유일했다. — (중략) — 웨이터들은 아기 바구니를 우리 둘 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이는 파란색과 흰색 점이 찍힌 오건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 7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더 비스트로에서 시드니 코샤크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먹는 이 점심은 선택 이야기의 해피 엔딩이었다.

p 76.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아직 그 아이의 땋은 머리채에 꽂힌 스테파노티스와 면사포를 통해 드러난 플루메리아 문신을 본다. 성 요한 성당에서의 그 아이의 결혼식 날 장면 중 내가 아직 보는 것 또 하나는 그 아이가 신은 구두의 선홍색 밑창이다. 그 아이는 엷은 색 공단에 선홍색 밑창을 댄 크리스티앙 루부탱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선홍색 밑창이 보였다.

p 83. 지금 그 사진들을 보며 참석한 여자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샤넬 정장을 입고 데이비드 웹 팔찌를 낀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나는 흠칫 놀라게 된다. 이 시절은 새라 맨키비츠의 디너용 민튼 접시에 담기 위해 프라이드치킨을 만들고 사이공 여행에서 아름다운 여자아기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 위해 포르토 양산을 사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에선가. 내가 ‘엄마노릇’의 주요사항들을 완수했다고 실제로 믿고 있던 날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집중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자신의 노화에 대한 언급들이었다. 나는 작년에 마흔이 되었고 만성질환이 하나 생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노화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이 정도의 가벼운 늙음은 견딜 수 있지만, 정말 진짜로 늙어보이는 나이에 이르면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게 될 지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노안이 와서 가까운 글자가 안 보이는 그 첫 순간에 나는 아마 울음이 터뜨릴지도 모른다.

p 120. 손상이 육체적 범주를 넘어서면 어쩌지? 문제가 인지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한 때 환영했던 문체의 부재가, 내가 조장했으며 북돋우기까지 한 직선적 경향이, 이 문체의 부재가 제 나름의 사악한 일생을 막 시작한 것이라면 어쩌지? 적정한 어휘, 적절한 사고, 어휘들이 말이 되게끔 해주는 맥락, 리듬, 음악 그 자체를 불러내지 못하는 이 새로운 무능력이… 이 새로운 무능력이 체계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말이 되는 어휘들을 다시는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지?

p 147. 나는 허츠 렌터카 회사의 직원이 차의 시동을 걸어준 이유를 꾸며낸다. 나는 일흔다섯살이다. 이것은 내가 제시하는 이유가 아니다

p 148. 사실 나는 노화에 관해 그 어떤 대응도 한 바가 없다. — (중략) — 1년에 두 번 범블 앤드 범블의 염색실에 들를 때마다 마주치는 모델들은 기껏해야 열여섯 또는 열일곱 살일 것이니 그들과 나의 격차를 개인적인 실패로 해석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p 151. 내 피부와 내 머리카락과 내 인지능력조차도 모두 나 내가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에스트로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는 4인치 굽이 달린 빨간색 스웨이드 샌들을 신지 못함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금제 고리 귀걸이와 검은색 캐시미어 레깅스와 에나멜 칠이 된 비즈 목걸이는 더 이상 잘 어울리지 않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의 여자가 그처럼 세세하게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엉뚱한 허영의 표현으로 이해될 것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중대한 변화로서, 완전히 다른 ‘그것’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1934년 12월 생인 조안은 이 책을 쓸 때 75세였는데, 문장들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사이 몇 년이 더 흘러 조안은 여든을 훌쩍 넘었고, 몇 년 전에는 셀린느의 지면 모델이 되기도 했다.

Joan-Didion (1)

오늘 같이 있던 시간이 흡족했던지, Aa에서 나오는 길에 남편이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며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십년 정도 남았을 텐데, 금방 가겠지.’ 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새해 첫날의 저녁을 뭐 해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낭풍 김치찌개집 간판을 봤고, 마트에서 돼지고기 김치찌개 재료를 샀고, 정말로 맛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해 먹었다. 이렇게 2018년 1월 1일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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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키즈의 생애 / 안은별 인터뷰집 (안은별 저, 코난북스)’를 읽고

게으른데다가 최근 각자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진 우리는 크리스마스에도 아무 계획이 없었다. 24일 밤에 남편과 ‘강철비’를 보고 들어왔고, 나는 읽다 만 이 책을 새벽 4시까지 다 읽고 잠이 들었다. 이것이 올해의 우리의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이 책의 서문만 읽었을 때 화가 날 정도로 서운했다.  IMF 때 10대였던  80년생의 삶을 IMF를 중심으로 두고 기술해 보려고 했던 이 책은 인터뷰이들의 면면만 보고도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였다. 나에게 서문은 저자의 긴 변명문이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터뷰이를 선택한 주요 채널을 트위터로 삼았다고 하길래, ‘어, 신선한데? 그래,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물색하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구나. 80년대생답다!’라고 흥미롭게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가 선택한 7명은 모두 대학교육을 경험했고, 다수는 중산층 출신에다가, 절반은 명문대를 경험했다. ?!?!?! 이렇게 편향된  7명의 이야기를 모아서 어떻게 일반화할 만한 큰, 사회학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저자 자신과 얼마나 비슷한지 겨뤄보려는  7개의 분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저자가 이미 이해해서, 해석이 쉬운 사람들만 추린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왜 좀 더 이 사회의 끄트머리에서 미끄러져 살아온 동년배의 친구들의 목소리들을 채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서문 3에서 자신의 이러한 문제를 알고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알아보려는 충분히 시도를 하지 않고, 이걸 자신의 한계로 치부해 버린 작가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대의 기록자가 된다는 것에 사명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2011년 동일본 지진에 대해 다른 매체에서 쓴 ‘현장으로 가는 과정의 어려움’을 다룬 기사를 언급했다. 그것은 기사로서는 실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해현장의 처절함을 진실되게 보여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저자가 자신의 결과물을 보는 잣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저자가 자신의 이 책은 철저하게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라고, 이 젊은이들의 삶을 읽어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맵게 쓰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것이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많이 울컥 했고, 사실 조금 울었다. 7명의 이야기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근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인데, 너무 생생해서 파워풀하다. 이 책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이들의 이야기들에 모두 삼켜졌다. 이 땅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삼성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든지, 우연히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 사상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되어 가장 왼쪽에 섰다가 지금은 중도보수의 당에서 일하는 광주 기반의 정치가이든지, 모두 돈의 룰에 맞춰 그들의 계급이 어느정도 결정되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김마리씨, 김남희씨, 김괜저씨. 특히 첫 번째로 소개된 김마리씨의 이야기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추동력이었다.

이야기들에서 IMF의 결정적 흔적은 희미하지만, 나의 후배들인 현재 30대의 삶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책은 현미경으로 한 명씩 들여다보려고 했던 책이지,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이야기까지 당겨오려는 욕심은 없었던 것 같다.

‘시도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그것이 한계였다고 윤색하고  어쨌든 기획은 잘 했으니, 이 미션은 그런대로 잘 끝낸 거 아닌가 하고 쉽게 자위하는 태도가 IMF 키즈,  80년대생의 특징은 아니겠죠.’라고 (저자에게) 냉정하게 묻고도 싶었지만,  일곱명의 이야기를 다 읽은 후에는 그저 그들의 불안*1)과 부끄러움*2)과 개드립*3)과 너무 쓰레기는 되지 말자*4)는 다짐을 위로하고 지지하고 싶다. 의심하며 위로해서 미안하지만.

1) 서유진씨의 인터뷰 내용 중 – 전 그냥 불안한 게 너무 관습화됐어요. 저는 ‘불안이 불안을 조장하는 거다. 굳이 그런 데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불안해요. (웃음) 불안할 수 있게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2) 홍스시씨의 인터뷰 내용 중 – 최근에 든 생각은 뭐냐면, 정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친구들에게 미안함보다는 안 치운 내 방에 대한 부끄러움이 커요. 그래서 미안함보다는 부끄러움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남편도 먼저 죽고 아들도 먼저 죽었는데 손녀까지 먼저 죽으면 되게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어요.

3) 역시 홍스시씨의 인터뷰 내용 중 – 근데 순간순간 나오는 개드립은 진심이에요. 히히히. 제 입에서 나오는 개드립은 말하자면 수면욕, 성욕, 식욕처럼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죠. 농담이 즐거워서 나오는 건 아닌 거 같거든요. 그냥 말장난, 개소리 같은 걸 내뱉고 싶을 때가 있는 거죠. 그게 제가 떠는 최대한의 위선이에요.

4) 전혀 없진 않죠. 돈 주면 하겠죠. 근데 하는 데까진 제 스타일대로 해보려고요. 어쨌든 작품으로 승부하는 게 좋고, 제일 양심적인 것 같아요. 사기를 쳐도 좀 양심적으로, 말이 되는 정도로 하자, 너무 쓰레기 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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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볼! (가와니시 레이코 저 / 워크룸 프레스)’을 읽고

고시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작년 가을, 오사카, 고베, 교토를 여행했을 때이다. 같이 갔던 남편이 고베에서는 한신 고시엔 구장을 가보고 싶다고 해 들렸더랬다. 남편이 어느날 우연히 TV 일본 스포츠 채널에서 해주는 고시엔 결승 경기를 보는데, 정말 패한 고등학교 선수들이 울면서 구장의 흙을 주머니에 담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을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바로 사서 읽었다.

1924년, 갑자년에 완공되어 갑자원 (일본어 독음으로는 고시엔)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신 타이거즈의 홈구장. 고시엔이 열리는 8월에는 한신이 원정 경기를 간다고 한다.

1924년, 갑자년에 완공되어 갑자원 (일본어 독음으로는 고시엔)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신 타이거즈의 홈구장. 고시엔이 열리는 8월에는 한신이 원정 경기를 간다고 한다.

경기장 밖의 바닥 벽돌 하나하나마다 구장 건립을 후원했던 후원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경기장 밖의 바닥 벽돌 하나하나마다 구장 건립을 후원했던 후원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자는 일본인이고, 그의  아버지는 유소년 시절, 당시,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대만에서 톈진 중학 야구부원으로 고시엔에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기록을 좇아가던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이렇다보니, 이 책을 읽다보면 가혹한 식민의 시대상은 많이 흐려지고, 부모님을 따라 조선, 대만, 만주에 흩어져 살던 일본의 소년들이 고시엔의 무대를 밟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들이 주요하다.  실렸있는 조선 야구부원들의 이야기도 있는데, 상세하지는 않다. 아마도 추측이지만, 그들은 그 시절 자녀들을 중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재력도 있고, 친일정부 성향의 집안의 자제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 조선 일반의 청소년들의 삶은 어땠을까? 이 책으로는 그것까지는 전혀 짐작해 볼 수 없다. 만주철도주식회사라던지 일본의 다이쇼 시대 등의 설명을 따로 찾아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과 교차되도록 했다. 특히, 지난 가을에 다녀왔던 대만 여행 후에 읽었던 대만 현대사 내용이 일본의 식민사를 대하는 대만인들과 한국인들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책의 종반부에는, 고시엔에서 활약했던 중등야구선수들 중에서 징병되어 태평양 전쟁에서 죽음을 맞게 된 몇 명의 이야기가 이름과  배경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되는데, 비극적인 사건을 통과하면서 맞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개인사를 볼 때마다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일본의 야구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가이세이 예과 학생들이 처음으로 홍백전을 치른 때가 1872년이었다고 하니, 미국과 30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라고 한다. 고시엔이 시작된 것은 1915년이고 전쟁 중 열리지 않았던 해도 있어서, 대회는 올해로 99회를 맞았다. 고시엔의 흙을 가져간 시초는 1936년 센바쓰의 결승전에서 패한 구마모토 공업의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구장 내 흙을 주머니에 담아 모교 그라운드에 뿌린 것이라고 한다.

땅! 하고 공맞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시원한 홈런같았던 책의 표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라운드는 애초에 전쟁의 시대와 불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파아란 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고 꿈꿨던 그 시절의 소년들을 뒤늦게 응원하고 연민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 책에조차 제대로 실리지 못 한 조선의 중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을 말이다. 언젠가는 그들의 표정도 역사가들에 의해 선택되는 날이 올까. 이 책의 역자가 언급한 ‘조선야구사’를 더 읽어보고 싶었는데, 품절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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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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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은 책을 닥치는대로 읽고 있다. 10일간의 연휴 중 며칠을 떼어서 책을 좀 읽었다. 핸드폰 첫 페이지에 있었던 트위터 앱도 지우긴 했다.

2017년도 2달 반이 채 안 남았는데, 올해 읽은 책이 이십여권 정도뿐이다. 헐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날로그의 반격’. 이건 빨리 읽고 주말에는 내가 주문해 놓은 책들을 읽을 거다.

테스트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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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Vs. 패션 (박세진, 워크룸프레스)을 읽고

요즘 나는 트윗타래를 따라가다가 책 소개 트윗을 보고 책을 구입하는 편이 많아졌는데, 이 도미노총서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난 후, 도미노 시리즈에 관여한 함영준 큐레이터의 성추행 뉴스가 보도되고 재간이 힘들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이 책과 시리즈로 나온 탄탈로스의 신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을 추가로 구매했는데, 물론 이 작가나 출판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죄책감이 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는…)

 

요즘에는 자라나 H&M도 기웃대지 않고 거의 유니클로에서만 옷을  구매하는 나의 쇼핑패턴을 떠올리면 요즈음은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가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사입는 유니클로가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그런 나의 가정이 맞을 수도 있겠다라는 동의를 이 책으로부터 구한 것 같다.

 

이 책은 패션 관련 글을 써 왔다는 박세진씨가 도미노 동인지에 실었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패션 브랜드 런칭을 준비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읽었던 GQ마저 잘 읽지 않고 있었기에 오랫만에  패션 관련 아티클을 읽어본 셈이다. 그간 나름 부지런히 관련 글을 읽어왔음에도, 근과거와 동시대의 패션 산업에 대해 거시적인 이야기는 처음 읽어본 것 같다. 읽는 내내 너무 흥미로웠다.

 

특히, ‘나만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너무 커서 무의미해져버렸고, 시대를 선도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이상, 자신이 고유하게 구축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스타일이 아닌, 어떤 트렌드를 빠르게 이해하고 따라가는 식의 코스프레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한 부분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자아추구는 차라리 다른 데서 하고, 옷에 대한  필요한 정보량은 최대한 줄이고 그냥 세간이 하라는대로 따르는 것이 낫다.라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몇가지는 좀 더 숙고할 부분들도 있다.

지은이는 전후 일본에서 자국의 스타일대로 복각했던 아메리칸 캐주얼 VANS를 프로토타입으로 삼고 저렴하게 압축생산하고 있는 유니클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최근 유니클로의 콜라보 라인을 보면, 모두 유럽의 디자이너들과 손을 잡고 있다. (질샌더, 이네스, theory, Liberty, 카린 로이펠트, 그리고 최근의 Lemaire까지) 미국 IVY 캐쥬얼보다는 유럽의 매끈한 클래식 캐쥬얼 무드를 담으려고 하는 야망이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왜? 에 대한 답까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쨌든 최근의 패션의 흐름에서 SNS에서 좋아요로 치환돼 버린 디자인, 패션의 유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내 생각은 요즈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뭘 입었는지조차 real-time으로 체감하는 것이 아니라 Hyper-Time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주위의 현실 세계에는 눈길이 잘 가닿지 않는다. 핸드폰 안의 이미지와 링크 속에서의 패션이 더 자극적이지 않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 코스프레를 위해서는 내 옆의 스타일 세터를 훔쳐보기보다는 인스타그램 스타가 올린 사진 속 아이템들이 무엇인지 묻는 DM이나 해쉬태그를 통해 트렌드가 매개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패션에서 크게 성공하려면 하이퍼 월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의류학과가 옷을 만드는 학과인지도 모르고 점수에 맞춰 지원했다 다른 곳은 다 떨어지고, 이 학과에만 합격해서 다닌 이후로 동거가 시작된 패션과 디자인이라는 세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의류학과에 입학했던 해(1996년)에 동대문 종합시장 맞은편에서 해외패션지만 모아파는 서점에서 처음 직접 산 잡지인 ‘Fashion Show’에서 알렉산더 매퀸의 런웨이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후 줄곧 나에게 ‘패션은 사치스러우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정언을 체화했던 패션 디자이너의 아이콘이었다. 이제 그런 고유한 (authentic) 디자이너는 필요없는 코스프레의 시절이다. 그러므로 그와 나의 시대가 많이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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