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대 때 이 책을 뒤적였던 것 같다. 마흔을 앞두고도 여전히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는 다행스러운 상황에서 이 고전을 다시 손에 잡았다.내 나이가 이 책을 읽는 최적의 때는 아닐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을 읽는 최적의 때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호밀밭의 파수꾼’을 나처럼 30대에 읽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좀 늦었다.
내일 죽는다면 지금 당장 무얼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정말 비싸고 희귀한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과 장신구를 마음껏 입고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돈으로만 경험해 볼 수 있는 감각의 세계를 탐닉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죽음이 바로 코앞에 둔 상황이 아니고서는 내가 결코 선택할 수 없는 무질서의 세계이다. 뭐, 결국 죽음 이후의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겠지만.
파우스트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노년의 학자이다. 이제부터는 사탄,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으로 모든 감각에 빠져 보기로 한다.
‘나는 도취경, 극히 고통스러운 쾌락,
사랑에 눈 먼 증오, 통쾌한 분노에 빠져 보고 싶네.
내 마음은 지식에의 열망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떤 고통도 피하지 않을 걸세.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을
가슴 깊이 맛보려네
지극히 높은 것과 지극히 깊은 것을 내 정신으로 붙잡고
인류의 행복과 슬픔을 내 가슴에 축적하고,
내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 넓히려네.
그러나 결국에는 인류와 더불어 몰락하려네.’
젊음도, 사랑도, 미(아름다움)도, 전쟁에서의 승리도, 부도 경험해본 그가 최고의 행복을 꿈꾸는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마지막을 메피스토펠레스가 선고한다.
‘어떤 쾌감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행복에도 흡족하지 못하고서
항상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뒤쫓아 다니더니,
가련하게도 시시하고 공허한
최후의 순간을 붙잡으려 들다니,
결국 시간 앞에 무릎 꿇고서 백발로 모래 속에 나자빠져 있구나.
시계가 멈추었노라.’
<문장들>
1. 메피스토펠레스가 ‘네가 누구냐’는 파우스트의 질문에 자신을 설명하는 문장 -
저는 항상 부정하는 영입니다!
생성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죽어 없어지기 마련이니
부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메피스토펠레스가 마녀가 그녀의 구구단을 외우는 것을 본 후 -
완벽한 모순은 현명한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똑같이 비밀스럽기 때문이오.
3. 황제의 연회에서 풍자시인이 -
나같은 시인이
언제 정말로 기뻐하는지 아는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을
노래하고 말할 수 있는 때이니라.
4. 생명의 실을 잣고 고르고 가위로 자르는 운명의 세 여신들의 대화 중 클로토의 노래 중 -
언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실을 잡아채어
빛과 공기에 오랫동안 매달아 두고,
참으로 유익할 것 같은 희망의 실은
잘라서 무덤으로 끌고 가느니라.
그러나 나도 젊다 보니
이미 많은 잘못을 저질렀노라.
오늘은 자제심을 발휘하여
가위를 가위집에 넣어 두었노라.
5. 파우스트의 제자 바그너가 수백가지 재료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존재인 호모쿨루스를 보고 프로테우스가 하는 말 -
그렇다면 진정으로 동정녀의 아들이로구나
존재해야 하기도 전에 벌써 존재하다니!
6. 세 자매이지만 셋이 합쳐서 눈이 하나 이가 하나인 포르키아스 앞에서 합창단의 노래 중 -
그러나 아아, 우리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는
애석하게도 눈을 더 없이
아프게 하는 슬픈 불운이 필요하느니라
사악한 것, 영원히 불행한 것이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불운이
7. 죽은 파우스트 앞에 두고 메피스토펠레스의 말 -
지난 일이라니! 그런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느냐.
왜 지난 일이란 말이냐?
지난 일과 순수한 무는 완벽하게 일치하느니라!
창조된 것을 무로 뺴앗아가는 것,
그 영원한 창조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마치 없었던 것 같으면서도,
나는 영원히 공허한 것이 더 좋단 말이다.
8. 파우스트의 불멸의 영혼을 데리고 올라가는 천사들의 노래 중 -
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자는
우리가 구원할 수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