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 (조안 디디온, 뮤진트리)’ 을 읽은 2018년 1월 1일

새해 첫 날 읽을만한 책은 아니었다. 책을 읽고 나니, 죽음과 노화에 대해 골똘해졌다. 새해 첫 날에는 그래도 희망이라던지 신년 계획 등을 세워보는 게 좋 다는 것을 오늘 귀납적으로 알게 되었다.

진작부터 저자의 다른 책인 ‘상실 (The Year of Magical Thinking)’을 읽고 싶었는데, 절판됐기에 그냥 잊고 있다가, 지난 달에 이 책을 구입해서 하필 며칠 전부터 펼쳐 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남편과 나, 둘 다 출근하지 않았다. Aa에 같이 가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었고, 남편은 방송을 위한 선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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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서문 뒤부터는 내용의 1/3이 지나기 전까지  책 속으로 깊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장들이 잘 읽히지 않았는데,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작가의 본래의 문체가 한국어로 바뀌면서 낯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안이 책 속에서 묘사하는 풍경들이 미장센이 세련된 영화의 장면들 같다. 조안 디디온이 워낙 패션이나 영화 시나리오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캐롤, 아이엠러브, 파프롬헤븐 같이 우울하지만 우아한 영화들이 떠올랐다.

p 69. 입양이 법적으로 완결된 1966년 9월의 어느 더운 날, 우리는 그 아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시내의 법정을 떠나 베벌리 힐스의 더 비스트로 식당으로 가 점심을 했다. 그날 그 법정에서 아기 입양은 그 아이 건이 유일했다. — (중략) — 웨이터들은 아기 바구니를 우리 둘 사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이는 파란색과 흰색 점이 찍힌 오건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 7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더 비스트로에서 시드니 코샤크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먹는 이 점심은 선택 이야기의 해피 엔딩이었다.

p 76.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아직 그 아이의 땋은 머리채에 꽂힌 스테파노티스와 면사포를 통해 드러난 플루메리아 문신을 본다. 성 요한 성당에서의 그 아이의 결혼식 날 장면 중 내가 아직 보는 것 또 하나는 그 아이가 신은 구두의 선홍색 밑창이다. 그 아이는 엷은 색 공단에 선홍색 밑창을 댄 크리스티앙 루부탱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선홍색 밑창이 보였다.

p 83. 지금 그 사진들을 보며 참석한 여자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샤넬 정장을 입고 데이비드 웹 팔찌를 낀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나는 흠칫 놀라게 된다. 이 시절은 새라 맨키비츠의 디너용 민튼 접시에 담기 위해 프라이드치킨을 만들고 사이공 여행에서 아름다운 여자아기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기 위해 포르토 양산을 사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에선가. 내가 ‘엄마노릇’의 주요사항들을 완수했다고 실제로 믿고 있던 날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집중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자신의 노화에 대한 언급들이었다. 나는 작년에 마흔이 되었고 만성질환이 하나 생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노화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이 정도의 가벼운 늙음은 견딜 수 있지만, 정말 진짜로 늙어보이는 나이에 이르면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보게 될 지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노안이 와서 가까운 글자가 안 보이는 그 첫 순간에 나는 아마 울음이 터뜨릴지도 모른다.

p 120. 손상이 육체적 범주를 넘어서면 어쩌지? 문제가 인지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한 때 환영했던 문체의 부재가, 내가 조장했으며 북돋우기까지 한 직선적 경향이, 이 문체의 부재가 제 나름의 사악한 일생을 막 시작한 것이라면 어쩌지? 적정한 어휘, 적절한 사고, 어휘들이 말이 되게끔 해주는 맥락, 리듬, 음악 그 자체를 불러내지 못하는 이 새로운 무능력이… 이 새로운 무능력이 체계적인 것이라면 어쩌지? 내가 말이 되는 어휘들을 다시는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지?

p 147. 나는 허츠 렌터카 회사의 직원이 차의 시동을 걸어준 이유를 꾸며낸다. 나는 일흔다섯살이다. 이것은 내가 제시하는 이유가 아니다

p 148. 사실 나는 노화에 관해 그 어떤 대응도 한 바가 없다. — (중략) — 1년에 두 번 범블 앤드 범블의 염색실에 들를 때마다 마주치는 모델들은 기껏해야 열여섯 또는 열일곱 살일 것이니 그들과 나의 격차를 개인적인 실패로 해석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p 151. 내 피부와 내 머리카락과 내 인지능력조차도 모두 나 내가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에스트로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는 4인치 굽이 달린 빨간색 스웨이드 샌들을 신지 못함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금제 고리 귀걸이와 검은색 캐시미어 레깅스와 에나멜 칠이 된 비즈 목걸이는 더 이상 잘 어울리지 않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 나이의 여자가 그처럼 세세하게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엉뚱한 허영의 표현으로 이해될 것임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는 하나의 중대한 변화로서, 완전히 다른 ‘그것’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1934년 12월 생인 조안은 이 책을 쓸 때 75세였는데, 문장들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사이 몇 년이 더 흘러 조안은 여든을 훌쩍 넘었고, 몇 년 전에는 셀린느의 지면 모델이 되기도 했다.

Joan-Didion (1)

오늘 같이 있던 시간이 흡족했던지, Aa에서 나오는 길에 남편이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며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십년 정도 남았을 텐데, 금방 가겠지.’ 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새해 첫날의 저녁을 뭐 해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낭풍 김치찌개집 간판을 봤고, 마트에서 돼지고기 김치찌개 재료를 샀고, 정말로 맛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해 먹었다. 이렇게 2018년 1월 1일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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